<삶정치> 개념의 재정의를 위하여
이 글은 <전미래(Futur Antérieur)>, 39-40호, 1997년 9월호에 실린 것을 번역한 것이다. 대부분 직역하고, 중간 중간에 [ ]안에 대체 가능한 다른 번역 혹은 이해를 쉽게 할 목적으로 역자의 덧말을 집어넣었다. 인용된 저서들의 국역본을 갖고 있지 못한 관계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으니 양해바란다. 이 텍스트의 많은 부분이 랏짜라또의 최근 저서인 <자본주의의 혁명들(Les révolutions du capitalisme)>, 2장 « 통제 사회에서의 삶과 생명체의 개념들 »에서 반복, 발전되고 있다. 원문은http://multitudes.samizdat.net/article.php3?id_article=426을 보라. ■ 역자
« 삶은 잠재적인 것들만을 포함한다 », 질 들뢰즈
1. 이전 논문에서[1], 우리는 정보 경제가 더 이상 ‘노동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을 탈취하고, 작업에 착수시킴을 주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삶 개념[2]을 정의해보자. 푸코는 자본주의가 권력 기술들의 제도 – 그가 ‘훈육적인’ 그리고 ‘삶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던 - 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전자가 ‘인간-신체’를 대상으로 삼았던 반면, 후자는 ‘인간-종’에 투자된다. 이 둘은 모두 ‘인간들의 다양체’에 호소한다[관계한다]. 그러나 전자가 다양체를 신체로 변형시키는 반면, 후자는 « 인간들이 신체들로 요약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다양체가 삶에 고유한 전체 과정들, 그리고 탄생, 죽음, 생산, 불운 등과 같은 과정들에 의해 변용되는 대중 전반을 형성하는 것으로서의, 인간들의 다양체 »[3]에 호소한다. 삶정치 기술은 « 전체 생물학적 과정들 내부에 신체들을 배치한다 ».
포스트-포드주의가 함축하는 이러한 삶의 시간은 푸코의 삶 개념과 관련해서 어떤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가 ? 내 생각에, 우리는 그것이 비생물적인 것(l’inorgqnique) 뿐 아니라, 특히 ‘비-유기적인(a-organique)’ 삶도 도입한다고 답할 수 있다. ‘비-유기적인’이라는 말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시간과 그것의 잠재성들’을 뜻한다. 추상적인 시간, 측정-시간(temps-mesure)이 아니라 역량-시간, 베르그송의 표현들을 따르자면,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들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는 원천’, ‘모든 것이 이뤄지도록 만드는 것’으로서의 시간 말이다.
삶정치라는 개념은 종의 생물학적인 과정들을 포함해야할 뿐 아니라, 그것의 기원에 있는 이러한 비-유기적인 삶도 포함해야만 하는데, 이는 이 비-유기적인 삶이 생명체와 세상의 기원에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그것[비유기적 삶]을 부과하는데, 그것은 ‘잠재적인’ 것(통속적인 사이버 상의 표현이 아니라,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이 창조성의 동인(動因)이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저 ‘유기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생기론, 배타적으로 생물학적인 과정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을 가리키는 생기론.
2. 비-유기적인 삶, 시간 그리고 그것의 구성적 역량에 대한 이러한 문제틀의 일차적인 사회학적 번역어로, 우리는 훈육 사회에서 이미 나타나는 ‘공중(public)’이라는 개념을 제시할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삶정치의 대상은 ‘주민(population)’이다. 우리는 삶정치의 대상이 ‘주민’뿐 아니라 ‘공중’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가설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공중이라는 말로,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언론, 텔레비전 혹은 정보망의 공중을 뜻한다[4]. 우리는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회학에서 형상화된 공중 개념을 취한다 (« 공중이란 한 정신의 다른 정신에 대한 영향이 원거리 행위가 된, 분산된 군중이다 »). ‘군중들(foules)’(군중이라는 개념은 부르주아지에게는 노동자 운동의 탄생이 불러일으킨 두려움을 표현한다)에 맞선 공격적인 반동으로 가득차 있던,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나는 르 봉(Le Bon)[군중심리를 이론화한 구스타프 르 봉을 가리킨다]같은 엄밀한 작가에게, 우리의 시대는 ‘군중들의 시대’라고 인정할 수 없다. 우리의 시대는 공중 혹은 공중들의 시대이며, 이는 [군중의 시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6]. 따라서 이 공중이라는 개념의 계보학은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폭발한 전복적인 (아나키스트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실천들을 통제할 필요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7].
공간 안에서가 아니라 시간 안에 현존함으로써, 공중은 구성된다. 타르드에 따르면, 공간이 시간에 종속되는 것은, 속도, 전달, 전염, 원거리 전파의 테크놀로지 안에서 구현되는 시공간 블록을 정의해준다. 훈육 기술들이 근본적으로 공간 안에서 구축되는 반면, 공중을 통제하고 구성하는 기술들은 시간과 그것의 잠재성들의 문제를 전면에 놓는다.
3. 푸코의 삶정치 개념은 이미 분명하게 지속-시간의 문제를 도입한다. 사실, 그 자체로 간주된, 주민을 특징짓는 현상들은 « 만일 우리가 그것을 그 자체로, 개별적으로 취한다면, 우발적이고, 예측불가능한 현상들이지만, 집단적인 수준에서는 설정하기 쉬운, 혹은 어쨌든 가능한, 구성요소들을 나타내는 현상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지속 안에서 진행되며, 다소 긴 어떤 시간의 한계 내에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계열의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삶정치는 지속 안에서 파악된 주민 속에서 생산되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관계한다’ »[8].
푸코는 특히 ‘주민’ 개념의 생물학적인 특성들 및 그것의 권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적 계열들로부터 독립되어서는 구성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오로지, ‘공중’이라는 개념만이 푸코가 사회 관계들을 정의하는 데에 도입하는 시간적 차원에 모든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종의 생물학적 과정을 가리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삶정치에 의해 제도화된 ‘조절(régulateurs)’ 메커니즘들은 훈육 메커니즘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조절 및 공중 생산의 메커니즘들을 가리킨다. « 삶정치에 의해 배치된 메커니즘들에서는, 물론 통계학적 평가들 및 전반적인 측정들에 대한 예측들이 우선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특수한 어떤 현상을 변경하거나, 개인으로서의 어떤 개인을 변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이 일반적인 현상들, 그것들이 전반적인 특성을 갖는 것 내부의 이 현상들에 대한 결정들의 수준에서 개입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특히 그것의 우발적인 장과 함께 이 주민 전반 안에서, 수단을 고정하고, 일종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평형을 보장할 수 있는 조절 메커니즘들을 정립하는 것이 특히 문제다 »[9].
한편으로, 우리는 신체들을 유기체로 개별화하고, 단수화하는 조련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전체 과정 내에서 신체들을 재편성하는 안정성의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다. 푸코는 이런 전체 과정들을 오로지 생물학적인 용어들로만 정의한다. 하지만, ‘삶정치적 메커니즘들’은 똑같이 공중의 구성에도 관여하는 바, 이것은 시간적 계열들 바깥에서는 파악될 수도, 조절될 수도 없는 우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어떤 특징들을 보여준다.
만일 ‘주민’의 조절이, 우리가 ‘개인-대중’이라는 훈육 커플을 포기하게끔 만든다면, 공중이라는 개념은 결국 우리를 다른 언어 사용역으로 데려갈 것이다. « 개인들[쪼갤 수 없는 것들]은 ‘디비뒤엘들(dividuels)[쪼갤 수 있는 것들]’이 되고, 대중들은 견본들, 자료들, 시장들 혹은 ‘은행들(banques)’ 이 된다 »[10].
4. [바로 위에서 우리가] 들뢰즈를 인용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명시적으로 통계와 설문 기술들을 참조하게 한다. 가브리엘 타르드에게 있어, 우리 사회의 경향은 ‘전 사회 집단들을 공중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자, 조절을 보장하기 위한 특화된 방식으로서 통계에 기대는 것이다. 통계는 자료들이 아니라, 사회적 행위들(죽고, 태어나고, 사고, 팔고 등) 및 강(렬)도들(‘욕망들’과 ‘믿음들’)을 시간적 계열들로 번역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계는 사회적 관계들을 경향 및 변주들로 표현하게 되며, 오로지 공중의 예측 불가능한 특성만을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들과 강(렬)도들은 무한소적이자 분자적이고, 의식적이자 무의식적이며, ‘흐름들(flux)’(타르드의 정의를 따르면 ‘흐름들(courants)’)을 구성하는 바, 이것은 ‘개인적’과 ‘집단적’의 모든 구분을 넘어선다. 그것들은 모방, 전염, 전파에 의해, 군중을 특징짓는 물리적 접촉들 너머로 확산된다. 이러한 행위들과 강(렬)도들은 그것들의 본성과 수로 인해 ‘훈육적’이지 않다. 단지 개연적인 처리만이 앞의 것들을 조절하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행위들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사실을 덧붙일 것이다.
따라서, 타르드에 의하면, 사회의 ‘지도(cartographie)’를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곡선도(courbographie)’(그래프의 ‘곡선’에 그것의 어근이 있는 신조어)를 그리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에 대한 통계적 이미지를 주는 것이지만, 후자는 시간적인 동학들, 경향들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통계는 사회적인 것을 사건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5. (‘주민’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공중이라는 개념은 다양체의 조절을 보장하는, 공간에 집중된 사회적 테크놀로지들을 위기에 빠트린다[12]. 그래서 감금은 더 이상 ‘공중’을 통제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더 이상 참조할만한 패러다임이 아닌 듯이 보인다. 만일 신체가 감금이나 훈육을 통해 유기체로 환원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중’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공중’은 통계적인 사회적 사실이 아니며, 하나의 유기체로 동화될 수도 없다. 그것은 변주, 경향, 생성인 것이다. 그것은 닫혀진 공간 안에서는 ‘훈육될’ 수 없을 것이다. 다양체가 ‘수적으로 그리 많지 않을’ 때에만, 다양체는 훈육화될 수 있는 것이다(노동자, 병자, 수감자). 다양체가 ‘공중’이라는 형태를 취할 때, 그것은 분자적인 동시에 즉각적으로 집단적이 되며, 흐름, 변주, 속도로 발전한다. 감금의 장소들에 의존하면서, 사회는 자본주의의 생산적 질서를 벗어나는 것을 한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공중의 운동은 너무나 분자적이고 집단적으로 되어서, 이러한 통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공중은 열린 공간에서만 조절되고 통제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구성하는 요소들, 즉 시간, 속도, ‘원거리 행위’를 통해서 흐름들 자체를 통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타르드가, 이러한 유형의 사회적 결집이 시간적 계열들에 의해 조직된, 시공간적 양식 하에서만 조절될 수 있기 때문에, 공중이 장래의 사회학적 차원이 되리라고 말할 때, 그는 천재적인 직관을 가진 셈이다.
‘신체’, ‘주민’ 그리고 ‘공중’은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되지 않으며, 서로 서로 절합될 수 있는, 훈육 및 조절의 상이한 양식들이다. 신체의 훈육과 주민 조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통제 양식들이 엄청난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이 이처럼 (여전히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의) 삶정치를 다시 특징짓게 된다. 나는 우리가 ‘공중’을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탈영토화된 모델로서, 따라서 다른 것들을 명령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모델로 정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공중은 사건이다.
6. 일단 시간 문제가 도입될 때, 일단 시간이라는 것이 더 이상 노동과 상품들의 측정-질료가 아니라, 그것이 삶 전체에 투자될 때, 우리는 ‘훈육 사회’와 ‘통제 사회’의 구분이 과연 자본주의의 변형들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스펙터클’[13]의 차원을 정당하게 파악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타르드가 제안한, ‘여론(public-opinion)’이라는 개념은 그 차원의 전제들을 정의한 것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포드주의는 (그것에 대한 단순한 현상학에서조차) 파악불가능하다. 사실 포드주의는 공장-복지-스펙터클이라는 ‘제도적’ 삼위 일체와 신체-주민-공중이라는 삼위일체 간의 통합을 실현하면서, 훈육과 삶-시간적 통제를 절합하는데 도달했다.
공장에서, 테일러주의는 ‘과학적인’ 양식 위에서, 신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시킨다(신체의 감각운동 도식들로의 환원). 복지(welfare)는 ‘주민’을, 예속의 형상들(가족, 여성들, 아이들, 건강, 교육, 노령 등에 대한 통제와 제도)을 증대시키는 상이한 재생산 과정으로 나누고 분산시킨다. 스펙터클은 ‘정치적인’ 것을 재정식화하는, 소통과 소비 사이의 항상 보다 밀접한 관계 속에서 공중을 나누고 증대시킨다. 포드주의에서, 신체, 주민, 공중은 다양체를 노동력으로 구성하는 것에로 정향된 조절과 통제 기술들이다. 공장, 복지, 스펙터클은 생산에서 사회적 힘들을 추출해내기 위해, 이 사회적 힘들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들이다.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훈육의, 삶정치의, 스펙터클의 기술들이 ‘노동 시간’과 ‘삶 시간’ 사이의 구분을 제도화함으로써 ‘시간’(부의 주체적인 형태)을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분에 기초해서, 공장은 그것의 생산성을 사회의 비생산성과 대립시킨다. 삶정치적이고, 훈육적인, 그리고 스펙터클의 메커니즘들은, 가치를 생산하는 시간(노동 시간)과 (권력의 관점에서, 그것에 대한 통제와 예속을 생산해내야만 하는) ‘삶의 시간’을 대립시키면서, 모든 신비적, 종교적, 자연적 참조로부터 ‘해방된’, 시간의 창조적 힘을 포획한다.
그러므로 공장, 복지, ‘스펙터클’은 이러한 시간의 구분을 조직하고, 코드화하며, 재생산하는 제도들이다.
7. 포드주의(‘대규모 산업 시대’)는 공중과 관련된 통제와 조절 형태들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화와 정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분석들을 참조해야만 한다. 그의 분석들은 타르드의 ‘공중’ 개념으로부터 ‘스펙터클’에 대한 상황주의자의 개념으로 넘어가기 위한 이행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영화, 보다 일반적으로는 포드주의 안에서 대중적 특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문화 생산은, 집단적인 지각 작용 양식들을 급진적으로 변형시켰다. 특히, 작가와 공중간의 차이는 그것의 일방향적인 특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 그것은 이제는 기능적일 뿐이며, 각각의 사례에 따라 다양화될 수 있다. 독자는 매순간 작자(작가)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 »[14]. 스포츠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영화 기술은 ‘정통한 사람’, 전문가로서의 공중의 참여를 부추긴다. 공중-대중, ‘작가’로서 개입하고자 하는 이러한 새로운 ‘전문가’는 작품들의 생산만큼이나 수용의 측면에서도 적합한 주체가 된다. 벤야민은, 영화 생산이 본보기처럼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 것처럼, 이러한 공중의 ‘전문가’로의 변형을, 노동 변형 그리고 지적 노동/수작업 노동 분할의 소멸과 연결시키는 데 공헌했다. 집단적 노동자의 구성 및 공중의 구성은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들이다. 노동자는 편집 연쇄에 직면해 있고, 공중 역시 유사한 양식 위에서, 이미지들의 연쇄에 직면해 있다. 노동과 지각 작용은 둘 모두 기계적인(machiniques) 장치들에 의해 정향된 것들이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타르드의 분석들과는 달리, 여기에서, 공중과 그것을 제도화하는 도구들은 단순히 통제와 안전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것들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가치들의 생산자일 뿐 아니라 창조와 집단적 혁신의 다른 형태들이기도 한 것이다).
8. 타르드와 벤야민이 분석한 바와 같이, 공중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드주의를 분석함에 있어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듯이 보인다. 사실, 포스트-포드주의는 정보의 경제에 의해 이끌리고, 지도되는 생산 양식으로 간주되며, 그것은 ‘서비스 관계’의 일반화 형태로서 파악되는 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타르드의 다음과 같은 분석 - « 모든 사회적 집단들은 공중으로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 » - 은 정당화되는 것 같다.
노동 형태, 복지의 예속화 과정들 그리고 소비자의 형상은 관계들 및 조절 방식들에 의해 재정의되는 데, 이것들은 모두 공중을 관리하는 양식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훈육이나 삶정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노동, 소비 그리고 삶은 분자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형태를 띄는 (타르드가 말하던 대로) 흐름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15]. 그것들은 점점 더 그것들의 ‘우발적인 측면’과 ‘예측 불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것들은 ‘어떤 지속 내에서 고려’되어야만 하는 ‘계열의 현상들’이 되며, 푸코가 주민에 대해서 썼듯이, ‘무수한 다양체’와 관련된다.
그러나, ‘공중’이 사회 관계의 일반적 형태로서 부과되는 순간에, 그 자체는 위기에 빠져들어 가는데, 왜냐하면, 벤야민이 경고한 바대로, ‘지각 작용과 노동’(공중과 작가) 사이에 정립된 가역성은 정보 경제에서는 하나의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지각 작용의 집단적 형태들, 창조의 집단적 형태들, 작가와 공중의 관계의 역전, 관객의 능동적인 역할, 이 모든 결정들은, 벤야민이 ‘문화적 생산’이라고 정의한 것을 통해서, 노동과 지각 작용의 비구분-가역성 속에서 하나의 현실이 된다.
수작업 노동과 지적 노동, 작가와 공중, 생산자와 소비자, 가치를 생산하는 기계들과 지각 작용을 생산하는 기계들, 물질적 생산과 기호적 생산, 이 모든 양자의 차이들은 본보기(패러다임적 모델)가 되고, 발전의 실제적 경향이 되어버린 정보 경제 안에서 생산적인 용어들로 재정의된다.
9. 정보 경제는 ‘힘들과 기호들’을 포획하는 새로운 기계이며,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현상들로서의) 탈영토화 운동들을 생산한다. 이 운동들은, 공장, 복지 그리고 스펙터클에 고유한 코드들과 예속의 과정들로부터 이탈하면서, (유기체, 언어 활동, 삶의) 오래된 지층화들을 해체하고, 주체성 생산의 새로운 집단적 배치들을 결정한다.
탈영토화의 집단적 운동들은 사회적 노동 전체를 위계화하고, 명령하던, 생산적이었던 것(노동자의 노동)과 그렇지 않았던 것(여성들, 아이들, 예술가들, 노인들 등의 노동)을 결정하던, 노동의 역사적 형태들과 모순되며, 그것을 파괴하고, 그것의 방향을 바꾸었다. 여성 운동이나 학생 운동에서는, 각 운동의 고유한 특정성에 중심을 둔 주장들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향해 정향된 복지의 예속화 장치들이 대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에 대한 관계’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주체화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과정들로부터 출발해서, 여성 운동은 권력과 관계하거나 그것과 갈등을 일으키며, 삶정치가 만들어내었던 종속 관계 – 이 안에서 ‘재생산’은 노동자의 경제적 재생산에 복속된다 - 와 단절한다. 기표와 상징적인 것의 제국주의 하에서, 탈영토화는 기호적인 것들의 다양체를 위계짓고 명령하던 언어 활동에, 비인간적이고 비의식화된 기호화작용의 다양한 흐름들과 형태들을 부과했다. 운동들은, ‘공중-전문가’의 잠재성들에 족쇄를 채우고, 그것이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방해하던 ‘스펙터클’을 소통 및 창조의 새로운 형태들과 대립시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운동들이 신체가 하나의 ‘메커니즘’이나 ‘유기체’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하며, 신체의 재생산이 종을 재생산하는 ‘생물학적’ 과정들로 통합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포드주의적인 예속 형태들로부터 적극적인 방식으로 해방되기 위해, 그 운동들은, 신체와 (삶의) 시간에 중심을 둔 주체성의 배치들을 생산한다. 여기에서 신체는 분자적인 것에서 우주적인 것으로, 연대기적이지 않은 시간으로 뻗어나간다.
10. 포스트-포드주의는 ‘스펙터클’ 개념이 단순히 예고한 패러다임의 변화들을 절합하고 발전시킨다. 이미지와 대상의, 실재와 상상적인 것의, 본질과 현상의 비구분은 ‘세상의 소멸’을 예고하는 것도,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점점 더 인위적이고, 과정적이며, 잠재적인 것이 된 실재에 대한 개념화를 예고한다. 노동, 삶, 스펙터클을 파괴하는 흐름들은 그것들의 탈영토화하는 힘의 관점에서만 특징지어질 수는 없다. 그것들은 또한 그리고 특히 강(렬)도로서 정의되어야만 한다.
60년대 말의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현상들로서의) 운동들이 작동시킨 탈영토화는 ‘노동 시간’과 ‘삶 시간’ 사이의 구분을 날려보내며, 시간을 포드주의적인 ‘결정화’로부터 해방시킨다. 탈영토화는 측정-시간을 해체하고, 창조-시간, 역량-시간 – 이러한 시간들의 잠재성은 ‘노동 시간’과 ‘삶 시간’ 사이의 구분에 의해서는 더 이상 조절되지도 강제되지도 않는다 - 을 출현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시간적인 새로운 내재성의 평면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은 또한 이러한 역량-시간을 통해서, 그것의 가치화 체계 및 착취 체계를 재정의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이 ‘삶’과 합치되었다고 말할 때, 생산력주의적이고 생기론적인 어떤 오해들을 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한 범주가 다른 범주에 의해 종속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과 삶을 재정의할 것을 요청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삶으로 확장되며, 삶을 되찾는다. 이 과정은 심원한 변화에 의해 이러한 범주들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 ‘비오스’는 더 이상 ‘전체의 생물학적 과정들’에만 제한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도 더 이상 공장과 사회의 구분, 수작업 노동과 지적 노동의 구분을 참조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 노동은 그것을 감각 운동 메커니즘에 통합시켜려던 시도들을 벗어난다. 삶 역시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노동과 삶이 가역성을 향해갈 뿐 아니라, 그것들은 개방과 창조로서의 ‘잠재적인’ 것에 의해 재정의된다.
11. ‘노동’ 에 대한 비판은 또한 ‘삶’ 개념에 대한 비판이어야 한다. 삶을 ‘종을 재생산하는 생물학적 과정들’에로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푸코의 기막힌 분석은 어떻게 삶권력의 출현이 ‘국가의 메커니즘들 내부에서 등록의 지속(l’inscriptionduracisme)( ?)’을 가능케 했는가를 보여준다. 사실, 어떻게 근대의 규범화 권력은, 그것이 삶에 대한 발전, 통제, 재생산의 기능을 받아들이자마자,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생살여탈권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
« 인종주의, 이것은 우리가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이다… 물론, 죽게 만든다는 것으로, 나는 단순히 직접적인 살인을 뜻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죽음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죽음에 노출시킨다는 사실, 어떤 이들에게 죽음의 위험을 배가시킨다는 사실 혹은 아주 간단하게, 정치적 죽음, 추방, 배척, 등 »[16].
인종주의는 ‘나의 삶과 다른 이의 죽음’ 사이에 군사적이거나 전쟁적인 질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유형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인종주의는 의고적인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관리라는 가장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방법들과 연결된 국가적 메커니즘들의 산물이다. ‘정적(政敵)의 테마의 생물학적 외삽’을 전적으로 실현한 나찌즘은 갑자기 독일 인민을 오염시킨 어두운 악이 아니라, 죽일 수 있는 군주의 권리(‘절대적 살인과 절대적 자살’)을 일반화하는 데 도달한, 삶권력의 절대적인 확장이다[17].
전후에, 삶정치가 ‘노동 사회’의 재생산에 완전히 종속되었을 때, 그것을 조절하는 국가 메커니즘들은 ‘인종주의’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조장한다. 오로지 계급 투쟁들 – 심지어 좌파 정당들에도 반대하여[18], 삶정치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인종주의의 생산을 자기-가치화 과정들과 대립시킨 계급 투쟁들 – 만이 인종주의의 생산에 저항했다. 그러나 항상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주의’(그 용어의 맑스적인 의미에서, 즉 노동의 사회주의) 역시 필연적으로 인종주의를 생산하고 재생산함을 강조해야만 한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 국가, 복지의 제도들의 통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 특히 사실이었다. 이것은 소위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우에 그러했는데, 그러한 나라들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발생한]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갈등들의 폭발은 계급 투쟁 없는 ‘노동자’ 삶정치의 순수 생산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와 같이, 좌파가 권력을 잡고, 노동, 삶, 국가간의 아주 밀접한 관계의 조건들을 재창출했던 나라들의 사례이기도 하다. 르 펜과 이민자 정책들은 [단순히] 프랑스의 산물이 아니라, 삶을 관리하는 공화국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의 사례이기도 하다. 유럽은 ‘직업 사회’를 재생산하길 원하며, 그 사회가 이민(외국인들)에 의해 내외부적으로 위협받음으로써 살아가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만인에게 노동을’이라는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정적의 테마의 생물학적 외삽’을 재현실화한다.
따라서, 삶정치가 ‘종의 재생산’ 및 ‘완전 고용’ 사회의 재생산에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삶 개념은 역량-시간을 통해, 다시 말해, 국가와 노동에 반대하는 복지 메커니즘들을 재정향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재정의되어야 한다. 우리가 ‘전체의 생물학적 과정들’에 통합된 삶 개념을 대체해야만 하는 비유기적인 삶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역량-시간에 상응하는 주체성의 배치들을 발명할 필요성을 참조하는 것이다.
12. 노동과 삶은 경제 및 삶정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역량-시간으로부터 ‘종을 생산하기 및 재생산하기’를 재규정하는 새로운 차원의 활동성에 의해 정의된다. 운동들은 포드주의적 유형의 예속화 형태들(노동, 복지, 스펙터클의 형태들)을, ‘변용하고 변용될 수 있는’ 그것들의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평범한’ 주체성의 배치들과 대립시킨다. 탈영토화는 가치를 만들어내라는 정언 명법들 속에 사회적 힘들을 가두어놓는 노동, 삶, 언어 활동의 형태들을 해체시키는 것을 가능케 한다. 오로지 ‘힘들 그리고 기호들, 운동들, 그것들을 구성하는 역량’만을 참조하는 활동성을 추진시키면서 말이다.
‘비오스’ 개념은 외연적인 방식에 의해서만 재정의되는 것이 아니라(삶은 더 이상 노동과 ‘스펙터클’에 대립되지 않는다), 포스트-포드주의를 특징짓는 새로운 내재성의 평면을 통해, 내포적인(강렬한) 방식으로 재정의된다. 노동과 삶은, 그것들의 역량, 강(렬)도, 결국, 시간을 통해서, 정서들(그것들의 변용하고 변용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로 특징지어진다. 만일 지각 작용, 기억, 지성, 의지가 베르그송의 직관대로, 다양한 ‘운동 유형들’로 변형된다면, 정서들 역시 마찬가지로 흐름들, 강(렬)도의 미분들, 시간적인 종합들로 합성된다. 힘들과 그것들의 정서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제기한 바 있는 ‘주민’에 대한 푸코의 개념 같은) 사회 현상들은 ‘지속 안에서 본질적으로 확인된다’. 힘들과 그것들의 정서는 그 자체로 ‘시간의 결정화’, 다양한 변주들, 강(렬)도, ‘미립자 같은 지각 작용들’의 ‘시간적 종합들’이다.
맑스주의의 심오한 직관을 따르면, 시간은 존재의 씨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학(‘노동 시간’), 생물학(‘삶의 시간’) 그리고 ‘스펙터클’(«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로 무한하게 반송되는 텅빈 시간 »)이 성공시킨 시간의 포획과 단절한 양상들을 따라서만 그러하다.
13. 정보의 경제와 그것의 전자적, 디지털적 장치들은 유용하게도, 경험적인 방식으로, (삶의) ‘시간’의 내포적이고, 외연적인 이러한 함의를 표현할 수 있다. 내포적인 용어들로 말하자면, 전자적, 디지털적인 테크놀로지들은 강(렬)도, 운동들, 비-기표적인 흐름들, 시간성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내재성의 평면에 (그것을 재생산하면서) 고름(일관성)을 부여한다. 지각 작용, 기억, 개념화는 전자적, 디지털적인 흐름들이 그려내는 새로운 내재성의 평면과 관계를 맺게 된다. 전자적, 디지털적인 테크놀로지들은 지각 작용, 기억, 개념화,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운동들, ‘흐름들 간의 관계들’, ‘시간적인 종합들’을 (재생산하면서) 실현한다. 외연적인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항상 이 기계들이야말로, 그네들의 망을 가지고, 사회와 삶의 총체성을 되찾는다.
디지털적, 전자적인 테크놀로지들은 개별 신체들과 사회적 실천들 간의 가역성을 물질적으로 조직한다. 우리 안에 있는 집단적인 것과 우리 바깥에 있는 집단적인 것은 그것들을 횡단하고, 구성하는 기계들을 통해 서로 접속된다.
전자적, 디지털적인 기계들은 더 이상 기계적이거나, 열역학적인 에너지를 축적하고, 생산하는 모터들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유기적인 ‘에너지’로서 기능한다. [전자적, 디지털적 기계들은] 삶의 시간을 결정화하고, 축적하고, 재생산하고, 포획하는 기계들인 것이지, 더 이상 단순히 노동 시간을 그렇게 하는 기계들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타르드에게서처럼, 더 이상 통계가 아니라 바로 디지털이, 분자적이고, 집단적인 것을 파악하는 (종합하는) 능력을 가지며, 바로 디지털이 자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19] 것을 특징짓는다.
디지털은 ‘미세한 진동들’과 그것들의 시간적인 동학 – 그것들의 강렬도가 삶을 구성한다 -, 그리고, 타르드가 우리에게 표현한 대로, 더 이상 ‘사실들’로서가 아니라, 경향들 및 변주들 – 그것들의 연장 역시 마찬가지로 삶을 구성한다 - 로서 정의되는 ‘사회적 행위들’을 이해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14. 그러므로 ‘삶의 시간’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삶의 개념은 무엇보다 먼저 변용하고, 변용될 수 있는, 그리고 시간과 잠재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는 능력을 가리킨다. 정보의 경제는[20] 한 편으로 ‘힘들과 기호들’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 시간적인 모터들을 통해 조직된 집단적 장치들을 포획하고, 부추기고, 조절하고, 합성하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 경제는 ‘주체성의 생산’과 동일시될 수 있다.
네트워크와 흐름의 형태들은 동시에 ‘행위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특징짓는, 협동 및 주체성 생산 형태들 뿐 아니라, 세계-경제 내부에서 재생산되는 포드주의적, 전-포드주의적인 협동 및 주체성 생산 형태들을 파악하는 이러한 장치들이 소유한 능력을 표현한다. 화폐에 맞서[21], 그것들은 새로운 형태의 명령을 표현한다.
정보의 경제는 우리가 노동 개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이는 협동 형태들의 모터가 된 것이 더 이상 노동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노동이 기술적 역량, 과학, 본래적으로 사회적인 힘들에 대한 통제의 기능들을 통합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성 자체에서의 변화가 중요하다. 변용하고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의 발전은 협동 형태들의 토대에 있다. 본래적으로 ‘인간적인’ 힘들 (지각 작용, 기억, 지능, 상상 작용, 언어 활동) 및 그것의 정서들(변용태들)은 탈인간화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이버네틱하고 전자적인 기계들을 통해서, 세계-분자적인 흐름들 및 집단적인 장치들에 직접적으로 접속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들은, ‘지각 작용’과 ‘노동’간의, 신체와 정신간의, 객체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 간의 분할이 그것의 일방향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변신과 창조의 새로운 힘의 조건들이 창출되는 내재성의 평면을 결정한다.
15. 포스트-포드주의에서의 삶의 시간은 첫째로, 푸코가 우리에게 말한 생물학적인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계 시간(machine temps)’을 가리킨다. 삶의 시간은, 주체성과 세계의 생산에 참여하는, 기호적인 것, 힘들, 정서들이 지닌 복잡성과 동의어다. 삶의 시간은, 경향들 및 변주들로 정의되는 ‘사회적 행위들’의 다양체[다양한 ‘사회적 행위들’]에 상응한다. 삶의 시간, 그것은 총체성으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특이성이 지닌 힘 및 스스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임의의[불특정한] 주체성(subjectivité quelconque)’의 ‘소수자 되기’이다. 삶의 시간, 그것은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생물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정치를 가리키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정의이다. 노동 그리고 착취, 또한 ‘자기가치화’ 그리고 ‘혁명’은 삶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에 의해서 다시 펼쳐진다.
<미주>
[1] « Le cycle de la production immatérielle » inFutur antérieur, n°16, 1993
[2] 작업 중인 노트들처럼 이 다양한 지점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3] Foucault Michel,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Gallimard, 1997, p. 216.
[4] 사실, 이 마지막 것[정보망의 공중]은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공중이라는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5] Tarde Gabriel, L’opinion de la foule, Ed. Félix Alcan, Paris, 1901, p. VI.
[6] Ibid., p. 11
[7] 이 ‘공중’이라는 개념과 ‘부르주아 공공 영역’ 개념에 중심을 둔 하버마스의 정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8] Ibid., p. 219
[9] Ibid., p. 219
[10] Deleuze Gilles, Pourparlers, 1972-1990, Les éditions de Minuit, 1990, p. 244.
[11] 우리는 타르드의 이론을 도입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의 이론이 ‘공중’에 대한 통제 및 조절 기술들의 발전을 예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특히 그것이 사회학에 ‘분자 혁명’을 도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원자의 운동들 및 진동들의 ‘반복들’(‘하나의 동일한 물체의 원자들 그리고 하나의 동일한 광선의 파동들)로 구성된 물리적, 화학적, 천문학적 세계와 무한소적이고 분자적인 흐름들, 모방들(양식의 형태하에서의 모방, 전통의 형태 하에서의 모방)의 ‘반복들’로만 이루어진 ‘사회적 세계’ 사이에는 유사성들이 있다.
[12] 푸코는 우리에게 19세기 ‘노동자 도시’의 ‘훈육적’이고, ‘조절적인’ 메커니즘들의 예를 제공한다. 전자는 ‘도시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자생적으로 실행되는 일종의 폴리스[통치 정책]’로서, 그리고 가족들(한 가정 내의 각 구성원)과 개인들(각 자리에 있는 각각의 사람)의 건축학적인 배치로서 기능한다. 반대로 조절 메커니즘은 ‘주민 그 자체와 관련되며, 특정한 행동들을 결정한다’. 이것은 의료 보장 및 은퇴 체계들, 보건 규칙들, 섹슈얼리티, 출산,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치료, 교육과 연결된 메커니즘의 문제이다. 이 메커니즘들은 근본적으로 ‘도시의 조직화 자체가 주민들에 대해 실행하는 억압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간적 계열들은 공간의 조직화에 종속된다. 포스트-모던 도시는 그것의 통제 메커니즘들 속에서, [공간보다는] 시간에 우위를 부여하면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절합한다.
[13] ‘스펙터클’ 범주는 우리가 포드주의 패러다임의 복잡성을 파악하게 해주며, 또한 다른 세계로의 문턱으로 이끈다. 스펙터클은 사회의 특수한 측면(미디어들과 공중)에 대한 ‘사회학적’인 정의가 아니라, 모든 실재적인 것의 종속을 자본으로 번역한다. 따라서 이미지와 대상의 관계, 개념과 현실의 관계, 참과 거짓의 관계는 뒤집히는 경향이 있다. ‘스펙터클의 사회’ 이론의 한계는 이러한 자리 옮김을 오로지 ‘자본의 관점에서’, ‘스펙터클의 관점에서’ 등록한다는 점이다.
[14] BENJAMIN Walter, « L’oe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 in Écrits français, Gallimard, 1991, p. 158.
[15] 결국, 노동에 있어서, 우리는 한 편으로는 ‘개인적인 기업’을 포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보다 탈영토화되고, 집단적인 세계-경제의 사회화를 포함하는 배치를 향해간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것들은, 활동을 시간적인 용어들로 정의하는, 간헐성(자본주의 용어 상으로는, 불안정성), 운동(이동성), 변신(다가치성)이다.
[16] Ibid., p. 228-229.
[17] 저명한 경제학자 칼렉키(Kalecki)는 어떻게 복지 국가 및 공채(公債)에 대한 ‘케인즈적’ 관리에 대한 제 1 정책들이 나찌즘에 의해 실험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18] 저명한 경제학자 칼렉키(Kalecki)는 어떻게 복지 국가 및 공채(公債)에 대한 ‘케인즈적’ 관리에 대한 제 1 정책들이 나찌즘에 의해 실험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역자 : 각주가 잘못 된 것으로 보인다.]
[19] 나는 이 주제에 대해, < Videofilosofia, la percezione del tempo nel post-fordismo, Manifesto Libri, Roma, 1997>에서 폭넓게 다룬 바 있다.
[20] 소통 체계 세계 연구소에 따르면, 전체 정보 산업 (오디오비쥬얼, 정보, 원거리 통신)은 2000년 세계 국내 총생산(PIB)의 6.3%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은 5.7%를 차지하는 데, 이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 맞먹는 것이다. 일본 ‘통신 위원회’에 따르면, 2010년에는 전체 정보 테크놀로지는 국내 총생산의 6%를 차지할 것이다. 이와 비교하여, 자동차 산업은 1990년에는 일본 국내 총생산의 4.6%를 차지했다. 1995년 ‘세계 통신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 정보 통신 부문(원거리통신, 정보, 오디오비쥬얼 전체)은 나머지 경제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들이고, 소비되는 각 수 천 달러 중, 59%가 직간접적으로 정보통신과 관련된다 ». 정보통신부문에서의 부가가치는 장비 생산 산업들보다 우선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의 생산, 관리에 의해서 생산된다. 예를 들어, 현재, 원거리 통신 장비 시장은 세계 국내 총생산의 0.39%이고, 서비스 시장은 1.83%로서 총합하면, 2.22%가 된다. 2000년에, 2.2%의 세계 국내 총생산의 연간 증가율을 고려하면, 세계 국내 총생산에서 이 [ 정보 통신 부문] 시장 각각의 몫은, 0.4%와 1.97%가 된다. 따라서, 생산의 ¾가 서비스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21] 시간의 결정화로서의 화폐는 시간적 계열들을 통해 ‘어떤 행동들을 허용하거나 유도하는’ 제 1의 자본주의적 통제, 조절 메커니즘이다.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주장, « 근대인은 더 이상 갇힌 인간이 아니라, 빚을 진 인간이다 »는 아마도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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